서북청년단 재건? 노란리본 제거를 위해 서울광장에 나타난 서북청년단
노란리본 제거를 위해 서울광장에 나타난 서북청년단
서울광장에 노란리본을 제거하기 위해서 나타난 서북청년단.
"세월호 노란깃발 지겹다 이제..
저희들은 노란깃발을 절대로 없애자는 취지가 아닙니다.
이것을 이제 보관하고 이제 더이상 이 세월호에 대한 더이상 가슴에 묻고
서울시에 이것을 보관해달고 기자회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중략-
노란리본이 비를 맞고 너덜너덜한게 아이들 보기에 안좋다??
서북청년단 재건준비 위원회 대변인을 맡고 있다는.. 분의 말씀..
(기자 질문) 노란리본 회수하고 싶은 마음을 공문으로 보내도 되었을텐데?
(대변인 답변) 세월호 참사는 그들만의 참사가 아니다. 사회에 내재되어있던 병폐가 터져나온것인데..
왜 모든 상황을 박근혜 대통령이 모든 책임을 져야되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핵심은 이것 같군요.
정리해 보자면.. 세월호 참사의 모든 책임이 박근혜 대통령으로 몰아가고 있는 상황이라서.
그 구심점이 되는 상징적인 [노란리본]을 제거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라고 들리는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저의 생각...)
여기서 잠시 서북청년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위키백과 퍼옴]
개요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 월남한 이북 각 도별 청년단체가 대공투쟁의 능률적인 수행을 위해 선우기성(鮮于基聖)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여 설립한 우익청년운동단체이다. 1946년 8월경부터 대한혁신청년회·함북(咸北)청년회·북선(北鮮)청년회·황해도회(黃海道會)청년부·양호단(養虎團)·평안(平安)청년회 등의 각 대표 사이에 통합협의가 진전되어 서울 종로 YMCA강당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창단하였다.
강령으로는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의 전취(戰取), 균등사회의 건설, 세계평화에의 공헌 등을 내세웠고, 기구는 중앙집행위원장 외 11개 부서와 감찰위원회 및 지부로 구성되었다. 제일 먼저 결성된 지부는 강계(江界) 출신 청년들이 중심이 된 서울종로지부로서 김이협(金履浹)이 위원장이었다.
1947년 1월 이선파(李鮮波)를 위원장으로 한 서울중구지부, 평안북도 청년들의 서부지구, 청단지부(靑丹支部), 인천지부 등이 잇따라 결성되었고, 1947년 6월 10일 임일(林一)을 위원장으로 하여 대전에 남선파견대본부(南鮮派遣隊本部)를 설치하였다. 서북청년회는 좌우익의 충돌이 있을 때마다 언제나 우익진영의 선봉역할을 하였다.
1947년 3·1절 기념식을 각각 가진 좌우익의 시가행진중 남대문에서 충돌한 남대문충돌사건, 공산주의를 찬양·고취하던 민족예술제를 광복청년회와 합동으로 저지시킨 부산극장사건, 부산좌익청년운동의 본부격인 민주애국청년동맹의 사무실을 습격하여 서북청년회 부산지부의 간판을 건 좌익단체사무실점령사건 및 대북공작 등이다. 이러한 격렬한 반공투쟁은 모두가 공산치하의 학정에 못 이겨서 자유를 찾아온 그들의 과거경험이 크게 작용한 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렇게 서북청년회가 대공투쟁을 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1947년 4월에 환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이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지청천은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李範奭)이 만든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과의 갈등 속에서도, 전국 청년의 대동단결을 전제로 한 청년조직을 강력히 추진하여,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기존 청년단체들의 통합공작을 시도하였다.
통합공작에 참가한 단체는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을 비롯하여 광복청년회·대한독립청년단·청년조선총동맹·서북청년회 등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북청년회는 합동파와 합동반대파로 분열되어 심각한 대립이 계속되다가, 합동파는 1948년 9월 대동청년단에 통합되었고, 합동반대파는 문봉제(文鳳濟)·김성주(金聖柱) 등이 중심이 되어 서북청년단을 재건하였다. 이 조직은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으로 흡수 통합됨으로써 자연 해체되었다.
배경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이승만은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보존하고 있다.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라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말한 이 대통령의 발언록이 보존돼 있다. 이승만은 모슬포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를 신설하라는 대통령령도 공포(49년 1월 18일)했으며, 서북청년회 단원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는 내용도 기념관엔 전시돼 있다.
1947년 대동청년단이 결성되자, 선우기성 중심의 합류파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서북청년회에서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는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서북청년단의 간판을 사용하던 이들도 있었다.
암살사건 당시, 경교장에 임시로 안치된 김구 모습
한편 서북청년단 해체 요구가 나오자 장택상은 강력하게 반발하였다.[4] 조병옥 역시도 치안상의 문제를 들어 서북청년단 해산을 반대하였다.[4][5] 1947년 3월 3.1절 당시 활동과 관련해 장택상은 서북청년단에 5만원을 지원하기도 했다.[4]
서북청년회는 제주시민 10%까지 포함한 전국에서 30만명에 달하는 국민을 좌경분자 처단이라는 명목하에 탄압 혹은 살해했다. 서북청년회 중에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로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던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에 경교장에 들어가 김구를 살해했다. [3] [4]
또한 1973년 문봉제는 증언을 통해 선우기성이 장택상에게 불려가 쌀한가마니에 해당되는 액수의 봉투를 받았다고도 했다.[4]한편 좌파와의 무력충돌에서 승리하자 장택상은 그들에게 특별히 잔치상을 차려주기도 했다.[4] 한편 한민당·이승만로부터도 후원을 받았으나 자금의 대부분은 서북 출신 재산가들이 주로 지원하였다.[4] 그러나 최창학·박흥식 등 친일파의 경우에는 협박을 통해 자금을 얻어내기도 했다.
일부는 군으로도 들어왔다. 조선경비대 통위부장 류동렬, 경찰청 경무부장 조병옥, 서북청년회 위원장 선우기성 사이에 합의가 있었는데 당시 서북청년회 내부에서도 대동청년단으로의 합류파와 재건파 사이에 분열과 반목이 있으면서 제3의 길을 선택한 사람(서청원)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부터 가장 규모가 큰 극렬 우익단체로 활동하였고 1948년 12월 19일 이후 해체되었는데 의외로 서북청년단의 단원 중에서 성공한 사람은 얼마 안되며 한국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에 의해 처형당하거나 점차 한국사회에서 잊혀져 갔다. [1]
통일신문 기사 퍼옴 -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151
"서북청년단? 대한민국 시계바늘 어디까지 거꾸로 가나"
기사 내용 中
"과거 서북청년단이 저지른 일들은 입에 담기도 끔찍하다. 각종 정치테러에 제주 4.3학살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등은 이제 공공연히 밝혀진 사실이다. 더불어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 역시 서북청년단 회원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암흑으로 물들인 주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대변인은 "이 모든 것이 지금 박근혜 정권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노골적인 공안정국 조성에 이제는 시민들의 '카톡'까지 사찰하겠다고 나섰다. 그런 마당에 이승만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단물을 빨아먹던 서북청년단에 향수를 가진 이들이 등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노란리본의 의미도 함께 알아봅시다.
노란리본 의미는 무사귀환입니다.
노란리본 유래
대부분의 미국 음악 역사가들은 노란 리본을 사용하게 된 관습은 19세기 미국 독립 전쟁 또는 미국 남북 전쟁 시절 엔더슨빌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끝내고 귀가하던 한 수감자의 얘기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역사가들은 지난 4백여년 동안 여러 형태로 불려지고 있는 George Norton이 작곡한 노란 목도리를 맨 여인이라는 의미의 'Round her neck she wore a yellow ribbbon' 에서 노란 리본의 전통을 찾기도 한다.
1949년에는 이와 유사한 'She wore a yellow ribbon' 이라는 존 웨인 주연의 영화가 나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1973년에 토니 올랜도와 돈이 처음로 발표한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오래된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세요')라는 노래로 노란 리본은 더욱 유행하게 됐다고 볼 수 있다.
이 노래에는 전설같은 얘기가 따라다니는데, 1900년대 초에 3년 여 동안 감옥에서 생활하다 나온 사람이 뉴욕에서 플로리다 주를 향해 가던 버스 안에서 버스 운전사에게 전해 준 실제로 벌어졌던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후 1971년경에 뉴욕 포스트의 피트 해밀이라는 칼럼니스트가 자신이 들은 한 전과자의 이야기를 재구성해서 'Going Home'('귀향')이라는 글로 신문에 발표했고, 그 다음 해에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는 잡지에 게재되었다. 사실 미국 전역에서 노란 리본이 가장 많이 목격된 것은 1979년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발생한 뒤부터였고, 걸프 전쟁에 미국 군인들이 대규모 참가하면서 노란 리본은 더욱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세계 제 1차, 2차 대전 때만해도 노란 리본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으며, 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참전 용사들의 무사 귀환을 빌기 위해 나무들에 노란 리본을 매달기는 했지만 오늘날 처럼 대규모로 노란 리본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1]
노란리본의 의미는 무사귀환입니다.
아직까지 이를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세월호에서 실종자를 완전히 찾지 못함에 있습니다.
노란리본은 한분에게 책임을 몰아가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다만,
세월호 참사와 같은 어처구나 없는 억울한 일을 두번 겪지 않기 위해,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되었던 모든 사회적 병폐(관피아, 관료시스템, 도덕성없는 물질만능주의) 를 해결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이때문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포함한 세월호 특별법을 재정을 촉구하였는것이지요.
이번 만큼은 성역없는 수사를 통해 엄중히 문책하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